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문단 편집) === 군부의 극렬한 반대, 강한 후원자의 등장 === 이런 구데리안의 파격적인 전쟁이론은 보수집단인 프로이센 엘리트 장교들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터무니 없는 이론으로 취급했거나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며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평생 본 전차는 육중하고 느려터진 MK같은 전차나 비커스 같은 연약한 탱캣들이었다. 이해관계에 있어서도 반발은 엄청났다. 보병장교들은 보병의 역할이 전쟁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발했고 기병장교들은 수송부대에서 출발한 기갑사단이 전차 운용의 주도권을 갖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전차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기병장교들이 가장 빨랐으며 지지를 보낸 것도 기병장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포병장교들 또한 포병의 역할 축소에 대해 극렬하게 거부감을 보였다. 그 보다도 더 큰 문제는 원로급 고위 장교들이 자신의 통제를 무시하고 하급제대에서 전투 수행은 물론 전략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마음대로 내릴 수 있도록 부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임무형 지휘체계]]가 분명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의 군대가 강한 군기와 체계성이 중시한 이유 또한 분명하다. 후일 이 장점과 단점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인물이 바로 [[에르빈 롬멜]]일 것이다. 단 구데리안의 자서전에 따르면 노령의 장성 중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나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구데리안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응원해주는 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훗날 이점이 큰 부메랑이 되어 1941년 구데리안을 전쟁터에서 강판시키게 됐다. 구데리안은 군사이론을 연구하는 시간만큼이나 머리가 굳은 프로이센 장교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하는데에 그의 전력을 쏟아야만 했다. 설령 진보적인 장교들 조차도 구데리안의 기동전의 패러다임은 받아들이더라도 구데리안의 방법보다는 영국과 프랑스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다는 대립이 적지 않았다. 소련에 유학을 다녀오고 구데리안의 이론에 동의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요제프 하르페[* 르제프 전역 당시 9군 휘하 하르페 전투단의 지휘관으로 당시 9군 최정예 부대였다.],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발터 모델]], [[빌헬름 리터 폰 토마]] 등 소수였다.[* 군부 내 영향력이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일찌감치 기갑 부대 육성을 주장하던 이들은 정작 프랑스 침공에서 일선 기갑 지휘관이 되지 못하고 참모나 기갑학교장 등으로 2선에 물러나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비로소 구데리안 기갑군 예하 기갑 지휘관이 되어 엄청난 진격 속도를 과시했다.] 이들 중 토마와 모델은 [[스페인 내전]]에 파견되어서 전차의 실전 운용 데이터를 확보하고 공군과 지상 병력의 합동 전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던 와중에 구데리안의 군사이론에 매료된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적어도 2가지 이유에서 구데리안에 대해 열렬하게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첫째는, 정치적 위협요소인 프로이센 원로 군인들에 대한 견제였다. 상술했다시피 새로 창설하는 부대를 주력부대로 만들어 강한 전투력을 부여하고 기존 원로 장교들이 지휘하는 부대의 힘을 빼야했는데 구데리안의 이론은 거기에 완전히 부합되는 명분을 제공했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구데리안의 이론이 참호전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히틀러 자신부터가 말단 병사로 참호전의 지옥을 직접 경험하였으므로, 기존의 방식에 회의를 품고 있던 것은 당연하다 볼 수 있다. 물론 훗날의 [[됭케르크]] 정지명령이나 [[아르덴 공세]]을 통해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확신이 결여됐다는 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상 독일 군부의 그 누구도 참호전을 확실히 타개할만한 믿음직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 못했다. 반면 히틀러가 구데리안이 제시한 견해와 그 가능성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더라도 주목했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그 동안의 노력에 보답하며 루츠 장군에게 기갑사단의 창설 준비와 전차 개발을 명령했다. 전차 보유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였기에 구데리안은 궤도차량의 전술을 고안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농기구나 트랙터로 대신하거나 소련의 협조를 통해 은밀하게 진행했다. 한편으로 독일군은 경트랙터를 가장하여 우선 비커스 전차를 급조 모방한 1호전차를 개발했다. 구데리안의 자서전에 의하면 처음 나온 [[1호 전차]]의 시제품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1호 전차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이런 물건이 전방으로 나가냐"며 본인도 실전에서 쓸만한 물건이 아님은 짐작하고 있던 듯 하다. 1호 전차에서부터 구데리안의 이론이 적극 반영되어 모든 전차에는 무전기가 장착되지만 비좁았던 탓에 전차장이 장전이나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그는 몇차례의 기갑훈련과 워게임을 통해 일사불란한 전차 기동술을 선보이며 자신의 성과를 히틀러와 다른 장교들에게 과시했다. 1935년 드디어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군의 재무장을 선언하면서 3개의 기갑사단을 창설했다. 이 때 구데리안을 새로 창설된 제2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하고 이듬해 다시 중장으로 승진시켰다. 본격적으로 숨길게 없었던 이 시점부터 루츠 장군과 구데리안은 [[2호 전차|현실적으로 빨리 양산할 수 있는 전차]], [[3호 전차|그가 본래 구상한 주력전차]], [[4호 전차|이동 포병 전차]]의 개발을 진행하고, 기갑사단의 편성, 교리, 보급 방법, 훈련 방법 등 기갑 사단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정립했다. 구데리안은 루츠 장군의 지시로 자신이 고안한 완전히 새로운 기갑 병과와 작전술을 군전체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또 관철하기 위하여 1937년 그의 저작 '''<전차를 주목하라!(Achtung Panzer!)>'''를 발간하게 됐다. 한편 유럽의 정세는 히틀러에 의해 급격하게 변하며 전운이 드리워지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